늦은 오후지만 햇살은 정오 못지않게 강했다. 켄싱턴 가든과 하이드 파크의 잔디밭으로 둘러싸여 있는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로 가기 위해 웨스트 캐리지를 걷던 중, 초록색 지평선 위로 신기루처럼 우뚝 서 있는 진한 회색 벽이 눈에 들어왔다. 수천 개의 작은 개구부를 통해 햇볕을 받는 두 개의 파사드가 7월의 열기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보인다. 벽의 표면에는 잔물결이 이는 듯하고, 비현실적인 느낌은 다가갈수록 점점 뚜렷해져 손에 잡힐 것 같다.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은 수많은 구멍을 통해 숨을 쉬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거의 완전히 차단된다. 이 구조물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단지 그림자만 보여 벽 뒤쪽에서 움직이는 유령 같은 인상을 준다. 도심 한가운데를 내리쬐는 강렬한 여름 햇살 아래에서 시원한 회색 톤의 서펜타인 갤러리 파빌리온(이하 서펜타인 파빌리온)은 희망을 주는 신비한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방문객을 끌어당긴다.
런던 켄싱턴 가든에 위치한 서펜타인 갤러리 잔디밭에 이 우아한 파빌리온을 디자인한 프리다 에스코베도는 2000년 첫 번째 파빌리온을 설계했던 자하 하디드에 이어 단독으로 뽑힌 두 번째 여성 건축가다. 1979년 멕시코시티에서 태어난 에스코베도는 매년 개최되는 이 유명한 작업에 초청된 최연소 건축가이기도 하다. 서펜타인 갤러리의 예술감독인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와 대표 야나 필은 에스코베도를 올해의 건축가로 정한 동시에 데이비드 아자예와 리차드 로저스를 고문으로 선정했다. 이는 스밀얀 라딕이나 디에베도 프란시스 케레와 같이 전 세계를 통틀어 새롭고 역동적인 건축가에 초점을 맞추는 서펜타인 갤러리의 최근 노력을 반영한 것이다. 에스코베도는 멕시코시티의 이베로아메리카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하버드대학교 디자인대학에서 공공 미술 석사 학위를 받았다. 요즘에는 자신의 작품이 예술과 건축의 관계를 탐색하는 방법에 대해 저술하고 있다. “미끄러운 상태를 유지하라”는 커스텐 기어스의 조언에 충실하듯 에스코베도는 자신의 특수한 이상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모든 작업에서 경계를 적극적으로 허물어낸다. 완전히 다른 유형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함으로써 각 프로젝트가 서로를 통해 배우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 파빌리온의 콘크리트 중정은 거울로 된 천장과 얕은 연못을 일련의 다공 파티션으로 둘러싸고 있다. 두 개의 직사각형 볼륨은 가운데 중정과 틀어져서 배치되어 있는데 에스코베도는 이를 “압축, 확장, 다시 압축”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외벽은 서펜타인 갤러리의 동쪽 입면과 나란하지만 내부 중정의 축은 정북 방향에 맞춰져 있다. 한국의 한옥에서 흔히 보이는 중정은 멕시코 주거 건축물에서도 빈번히 나타난다. 이 중정을 휴식과 묵상의 장소로 만들고자 콘크리트 바닥에 섬세한 검은색 접이식 의자와 테이블을 늘어놓기도 했다. 중정에 들어서면 사람들이 이 공간의 제일 끝에 있는 좁고 얕은 연못의 가장자리에 서서 마치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서 발을 식히려는 듯 휘청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반사된 빛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거울로 된 천장은 중정 위에서 아치를 그리면서 아래에 있는 연못 가장자리에서 끝난다. 얕은 물의 표면에 하늘이 반사되어 보인다. 사람들은 원형으로 휘어진 거울 면을 올려다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본다.
구부러진 거울에 반사된 이미지는 왜곡되는데, 쌓여 있는 타일은 반짝이는 회색의 소용돌이 모양으로 변하고 뒤의 의자와 테이블은 거꾸로 된 가늘고 긴 선의 모습으로, 관람객들의 몸은 환상적인 모습으로 바뀐다. 콘크리트 바닥의 자연스런 마모조차 다른 차원의 파장을 일으키며 각 단계에서 흔적과 긁힌 자국이 흐려진다.
최근 인터뷰에서 에스코베도는 “나는 항상 내부와 외부의 관계에 매료되어왔다”고 말했다. “내가 살던 아파트는 다른 아파트와 마주보고 있었다. 나는 줄곧 외동딸로 자랐기 때문에 혼자 창밖을 내다보며 놀았다. 아파트를 바깥에서 볼 때는 모든 집이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안쪽에서 보면 완전히 달랐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에스코베도는 주위 사람들의 삶을 관찰하면서, 광대한 도시의 네트워크 속에서 살아가는 개개인에 대한 예리한 시선과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수많은 창문 하나하나를 통해 도시 사람들의 유일무이한 순간을 살짝 들여다볼 수 있었던 시간들은 에스코베도의 삶과 시간과 공간에 아주 가까이 자리 잡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에스코베도는 어떤 공간의 독특한 장식품이나 색상을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었으며 아마도 이런 기억이 에스코베도의 건물 외관의 벌집 같은 에너지에 영감을 주는 것 같다. “이처럼 여러 층을 거듭해서 쌓는 것은 멕시코에서도 흔하지만 내 작업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것이 내가 시간과 공간을 이해하는 방법이다. 흥미롭게도, 북쪽에 면한 중정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는 모든 국제 표준 시간대의 기준이 되는 그리니치 자오선과 가깝다는 것이다.” 에스코베도는 “우리는 그리니치 자오선이 여기서 불과 몇 마일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떠올렸다”고 설명한다. 그는 이러한 “추상적 시간, 사회적 시간, 과학적 시간 대 사회적 시간 또는 지속 시간”에서 영감을 받아 이 자오선에 대한 경의로 공간을 자오선에 맞추기로 결정했다. “이 미묘한 전환이 시간의 추상성에 대한 작은 제스처를 만들 수 있게 했다. 그리니치 자오선과 평행을 이루는 정렬은 천장에 강조되어 있다. 태양이 특정 방향으로 파빌리온을 통과하게 함으로써 관객들이 실제로 하루가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배경지식은 관객이 그 자체로서 시간측정기 역할을 하는 덮개의 공간 속에서 자신의 시간을 볼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알려준다. 명과 암, 인생의 부침, 개폐, 확신과 의심, 현실과 비현실 같은 이원적인 대립 사이를 일반적으로 가르는 선들은 이 환상적인 파빌리온에서 그 경계가 잘 구별되지 않으며 마치 바로 시간 그 자체처럼 그 벽 내부와 거의 관련 없이 추상적으로 보인다.
에스코베도의 고향 멕시코시티 건축의 특징은 그의 파빌리온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에스코베도는 멕시코시티의 주거 건축에서 흔히 쓰이는 전통적인 바람벽, 셀로시아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 벽과 차양은 일반적으로 멕시코에서 일조량을 조절하기 위해 세우는 구조물과 통합된 격자식의 바람벽으로서, 주택에 충분한 빛과 공기를 여과해 공급할 뿐 아니라 그늘막을 만들고, 프라이버시를 지키는 역할을 한다. 에스코베도의 파빌리온 벽을 가로지르는 물결무늬는 시멘트 지붕 타일을 수십 개 쌓아 강철 막대기에 꿰어놓은 태피스트리 같다. 에스코베도는 현지 재료를 사용하기 위해 풍부한 회색빛과 표면의 질감을 표현하기 적합한 영국 지역 회사의 타일을 선택했다. 그 결과 작고 단순한 조각이 강력하고 복잡한 전체를 만들어내는 효과를 낸다. 에스코베도가 설명하듯이 “벽 대신에 빛이 앞면과 뒷면 중 어디를 비추는지에 따라 투명도가 달라지는 격자 패턴을 만들었다. 패턴은 하루 종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더 투명하거나 불투명해진다. 이 작은 구멍들은 카메라 렌즈의 셔터처럼 사람이 지나갈 때 햇빛 아래에서 깜박거리면서 열리고 닫히는 것처럼 보인다. 바깥에서 보면 관람객의 시야를 가로질러 사람들의 움직임이 물결치고, 안쪽에서 바라보면 공원의 알록달록한 푸른색과 녹색만 보인다. 에스코베도는 자신의 디자인에 대해 “경험이 겹치고 누적되는 작은 순간에 관한 것”이라고 말했다. “정원에 있는 물건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기보다는 작은 프레임에 관한 것이고 바로 옆에 놓여 있는 공간들의 몽타주 같은 것이다.” 필자는 에스코베도가 자신의 프로젝트가 영화처럼 읽히기보다는 오히려 복잡하고 구체적인 부분에서 꿈과 기억에 쉽게 빠져드는 순간적인 장면들로 경험되기를 원한다고 생각한다.
2006년에 자신의 이름으로 회사를 설립한 이래, 에스코베도는 다른 프로젝트에서도 스크린과 격자의 가능성을 탐구해왔다. 2010년 세련된 흰색 격자무늬 벽돌을 개량해서 아카풀코의 보카 치카 호텔 리노베이션에 참여했다. 같은 해 첫 개인 프로젝트로 멕시코시티에 토론회나 모임 또는 공연을 개최할 수 있는 엘 에코 파빌리온을 만들었는데, 연회색의 콘크리트 블록으로 구성되어 방문객이 옮기고 재구성할 수 있는 장소 특정적 설치 작품이었다. 에스코베도는 2014년에 멕시코 화가인 데이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가 살았던 집과 스튜디오를 쿠에르나바카의 라탈레라 공공 미술관으로 탈바꿈시켰는데 건물군을 구멍이 뚫려 있는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쌌다. 이 벽은 원래 1960년대에 지어진 건물의 둘레를 따라서 확장되면서 건물들을 그룹으로 묶었지만, 햇볕이 공간 속으로 투과되어 전시실, 작업장 및 예술가의 레지던시를 비춘다. 2016년에 완공된 스탠포드 경영대학원 캠퍼스에서는 보다 재미있는 방식으로 개입했다. 선율을 낼 수 있는 적갈색의 코르텐 스틸 스크린을 고안했다. 아이들이 막대기로 금속 울타리를 긁으며 걸어갈 때 나는 소리 패턴에서 영감을 얻은 ‘공간의 매우 짧은 시간을 통한 시간의 매우 짧은 공간’은 개념적으로도 매력적이며 시각적으로도 인상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구조다. 자신이 선택한 닫힌 조각들을 번갈아 움직이면서 지나가면 소리가 난다.
현재까지 프로젝트에는 전체를 아우르는 스타일은 없지만, 재료와 경험면에서 끊임없이 적응하고 새로운 영감을 얻으려는 열망은 민첩한 디자인 능력의 기반이 된다. 완벽함의 시대에 던지는 “건축은 항상 아이디어 이상의 잔해다”라는 말은 참신하기까지 하다. 설계가 끝나고 공사를 마치면 건축가는 건축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잃어버린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에스코베도는 공간의 가장 중요한 가치들, 즉 힘을 부여하고 적응력을 입증하며, 기대치를 조정하고, 진실을 밝혀 영감을 주는 방식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최근 「패뷸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에스코베도는 “우리는 변화에 대한 계획이 필요하다. 모든 것을 모든 면에서 보다 유연하게 만들어서 건물이 완전히 단단한 구조가 아니라 마치 야자수 나무처럼 되도록 해야 한다. 뻣뻣한 건물은 무너진다. 물론 부분은 움직일 수 있고 변형되거나 사라질 수도 있지만 그 핵심은 남아 있을 것”이라며 2017년의 멕시코 지진 같은 자연재해의 가능성에 직면한 건축의 적응력과 유연성에 대한 자신의 열의를 말했다.
물론 서펜타인 갤러리는 임시 구조체다. 이번 프로젝트가 다음 건축물을 위해 자리를 내준 후에도 오랫동안 그 정신이 지속되기를 바란다. 이 고요하고 인도적이며 심사숙고할 수 있는 공간은 도시의 가장 번화한 곳에서 사람들을 환영하는 피난처다. 에스코베도는 이 곳에 오는 사람들의 상상력에 맞춰 매우 세심한 공간을 만들어냈다. 벽 안쪽에서 반사되는 빛의 반짝거림에 맞춰 시간은 다르게 흐르고 우리 모두를 통해서 새로운 선이 그려진다.
프리다 에스코베도의 서펜타인 파빌리온은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에서 6월 15일부터 10월 7일까지 전시된다. <진행 이지윤 기자>
▲ SPACE, 스페이스, 공간
ⓒ VMSPAC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