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적인 것, 자연적인 것: 허성범

「SPACE(공간)」 2024년 3월호 (통권 676호) 

오늘의 건축가

‘오늘의 건축가’는 다양한 소재와 방식으로 저마다의 건축을 모색하는 젊은 건축가를 만나기 위해 기획됐다. 그들은 무엇을 좋아하고, 탐색하고, 고민하고 있을까? 「SPACE(공간)」는 젊은 건축가와 대화를 나누면서 그들을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기보다는 각자의 개별적인 특성을 발견하고자 한다. 인터뷰는 대화에 참여한 건축가가 다음 순서의 건축가를 지목하면서 이어진다.​ 

자연을 위한 원고(2023) 렌더링 이미지​ ©architectural/practice

인터뷰 허성범 건축적사무소 대표 × 김지아 기자​

시작은 단순하게

김지아(김): 한국에서 학부를 졸업하고 스위스에서 교환학생과 실무를 경험했어요. 스위스를 선택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허성범(허): 학교 다닐 때 이런 인터뷰를 할 줄 알았다면 건축을 좀 더 빨리 좋아했어야 했는데. (웃음) 그때는 스위스 건축을 좋아했다기보다 그저 치기 어린 마음으로 외국에 나가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심지어는 치즈 만드는 방법을 배워오겠다며 비행기에 올랐죠. 건축보다는 세상에 관심이 많던 때라 뚜렷한 계기가 있기보다는 막연한 선택에 가까웠던 것 같아요.

김: 그러한 선택들이 모여 삶을 이룬다고 생각해요. 머무는 동안 무엇을 보고 느꼈어요?

허: 처음에는 교환학생으로 루체른에서 1년간 지냈어요. 첫 학기는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을 들어 그럭저럭 순조롭게 지나갔는데, 두 번째 학기에 고비가 찾아왔어요. 설계 수업이 독일어로만 열렸거든요.(웃음) 독일어를 할 줄 모르는 상태였기에 일주일간 다녀보고 아니다 싶었어요. 그길로 곧장 스튜디오 과목을 드롭하고 책과 텐트를 실어 알프스 지역인 그라우뷘덴으로 자전거 여행을 떠났어요. 그곳에서 페터 춤토르, 발레리오 올지아티, 기온 카미나다의 건축물을 답사했는데, 작은 도시나 환경에서도 다양한 건축이 구별되는 지점이 흥미롭게 다가오더라고요. 서울이나 부산 같은 대도시에서만 지내다가 인구밀도가 낮고 자연이 무성한 전원 풍경을 경험했는데, 그런 지역에서도 고유하고 치밀한 건축 작업이 이루어진다는 게 새로웠어요. 그때 보고 느낀 것들이 어쩌면 지금까지 건축을 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어요. 이후 한국에 돌아오니 복잡한 우리네 대도시 환경에서 건축이 오히려 비슷비슷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더군요. 막연하지만 그러한 지점을 건드리는 건축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죠.

김: 취리히와 런던, 서울의 건축사무소를 경험했어요. 주로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했나요?

허: 교환학생을 마치고 스위스에 남아 1년간 취리히에서 인턴으로 근무했어요. 그때는 학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외국인 신분인지라 특정 프로젝트에 깊이 관여하기보다 여러 프로젝트를 두루 경험하며 보조하는 역할을 했어요. 그러다 한국에 돌아와 김재경건축연구소에서 본격적인 실무를 했어요. 경북 상주의 단독주택 작업인 세 그루집(2018, 「SPACE(공간)」 620호 참고)을 담당해 수개월간 현장에 상주하며 건물이 지어지는 과정을 살펴보는 밀도 높은 경험을 했죠. 이후 워킹홀리데이로 영국으로 떠나 런던 맥멀란 스튜디오에서 설계공모 위주의 일을 했는데, 설치부터 도시계획까지 다양한 스케일의 작업을 했어요. 

건축적인 건축

김: 2020년경 귀국해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건축적사무소를 설립했죠. 독립을 결심한 계기가 있나요?

허: 영국에서 다시 스위스로 건너가 콩테/모블리라는 사무소에서 어린이집, 학교, 집합주택 등 다양한 작업을 경험하던 차에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터지면서 예정보다 더 이르게 귀국하게 됐어요. 그해에 결혼도 앞두고 있었고, 대학원 진학도 계획 중이었는데 생각처럼 흘러가진 않더군요. (웃음) 귀국 전 2020 DDP 오픈큐레이팅 공모가 있어 참여했는데, 마침 당선되면서 자연스럽게 건축적사무소를 설립하게 됐어요.

김: 사무소 이름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세요. 건축사무소도, 건축사사무소도 아닌 건축적사무소라니. (웃음) 

허: ‘건축적’이라는 형용사는 예술이나 패션 등 다른 분야에서 사용될 만큼 범용적이에요. 거기에는 비례나 구성, 구축적인 관점뿐만 아니라 공간, 환경, 역사, 철학, 예술 등의 입체적 관점이 녹아 있죠. 건축적이라는 말이 가진 유기적 성격이 건축 그 자체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건축적’인 건축을 하고 싶다는 바람을 사무소 이름에 담았죠. 하지만 반드시 고정적인 의미를 지닐 필요는 없어요. 영국에서는 아키텍처럴 프랙티스(architectural practice)가 사무실 프로필에 늘 적혀 있는 단어예요. 우리나라에서 건축설계사무소라는 말을 보편적으로 쓰듯이요. 이렇게 일반적인 단어가 한국에서는 특정한 의미가 되기를 바라면서 작업하고 있어요.

김: 건축적사무소의 소개 글에는 건축, 리서치, 교육, 도시, 자연환경이라는 키워드가 있어요. 어떤 활동들을 전개하고 있나요?

허: 여느 사무소와 마찬가지로 공모에 꾸준히 참여하면서 설계 작업을 이어가고 있어요. 동시에 숭실대학교와 계원예술대학교에 출강하며 드로잉, 매체를 다루는 표현 수업과 스튜디오 수업 등을 진행하고 있죠. 리서치는 거의 모든 작업의 바탕이 되는데 활동으로 말하자면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하는 사진에 해당해요. 도시 환경에서 자연적으로 생성된 사물이나 상황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이를 드로잉이나 다른 매체로 치환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도시와 자연환경은 매 프로젝트의 시작점으로 지금까지 해온 대부분의 작업이 도시를 매개로 접근하고 있어요. 특히 우리나라는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유사하게 느껴지는 지점이 있고, 아파트 등 집단적 주거환경이 지닌 독특함도 있어요. 이를 건축적 개념으로 풀어내면 흥미로운 작업이 탄생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또 도시를 다루다보면 자연이라는 키워드가 항상 따라붙고는 해요. 워낙 동시대의 주제이기도 하고요. 다만 ‘자연’의 개념이 조경에 국한되지는 않는다고 봐요. 

자연을 재정의하는

김: 2020 DDP 오픈큐레이팅, 2021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2023 서울마루 공공개입 등에 잇달아 참여해 도시적 관점이 드러나는 작업을 선보였어요.

허: 2020 DDP 오픈큐레이팅에서는 <아파토피아>라는 전시를 기획하고 참여했어요. 아파트와 같이 획일화된 주거 유형이 밀집된 도시에서 새로운 형태와 공간, 문화가 생겨나고 있다는 데 주목해 수납, 침대, 변기, 세면대, 운동기구 등 요소를 매개로 미래의 서울을 그려보고자 했죠. 2021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에서는 ‘발코니는 새로운 정원’이라는 작품을 선보였는데, 서울과 같은 대도시 환경에서 아파트의 발코니가 곧 도시의 정원으로 기능하는 현상에 초점을 맞춰 도시와 자연의 관계를 새롭게 사유해보려 했어요. 2023 서울마루 공공마루 개입의 파이널리스트에 오른 작품은 ‘산들바람이 부는 마루’(「SPACE」 670호 참고)인데요. 서울마루가 도시의 야외 공간인 만큼 계수나무와 초화류 등을 심어 시민들이 그 속에서 바람 등 자연 요소를 경험하도록 했어요. 단순히 시민들이 쉬어가는 장소를 의도했다기보다, 도시에서 자연을 위한 환경은 어떻게 구축되어야 하는지 고민했어요.

김: 줄곧 자연을 화두로 작업해왔어요. 건축과 자연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고자 하나요?

허: 건축과 자연은 대립항이 아니라 상호작용 속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관점에서 도시와 자연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도시관에 동의하지 않고요. 인공과 자연의 개념적 구분이 흐려지고, 가장 큰 인공물인 도시가 문화를 넘어서 환경이 된 지금, ‘자연’과 ‘자연적’이라는 개념을 재정의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어요. 예컨대 공원의 경우, 도시의 공업화에 대응해 생겨난 윤리적 공간이었죠. 지금은 면적에 따른 조경 비율이나 공개공지와 같이 도시계획적 관점에서 공원의 비율이 법제화됐는데, 이렇듯 현재까지 공원은 도시에 종속된 개념으로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사회문화적 환경이 변화하면 공간의 이미지 또한 달라지듯이 환경이 동시대의 화두인 지금, 공원 또한 자연의 재현 또는 도시의 종속된 공간이라는 기존의 이미지를 넘어서 또 다른 ‘환경’으로서 탐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령 200년 전까지만 해도 알프스는 사람이 오르기 힘든 거친 산맥을 가진 ‘끔찍한 산’으로 여겨졌어요. 하지만 영국 상류층 자제들의 그랜드투어가 유행하고, 1882년 고타드 레일웨이가 생겨난 이후로는 아름다운 자연경관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죠. 이처럼 기술 발달과 사회 변화로 인해 시간의 이미지는 압축되고, 공간 개념도 바뀌기에 건축적 사고방식도 이에 대응해야 한다고 봐요. ‘자연’과 ‘자연적’인 것의 개념이 바뀐다면 도시, 교외, 전원의 공간적 재정의가 필요할 테고 그렇게 되면 정원, 공원, 마당, 발코니, 옥상뿐 아니라 벽, 기둥, 창문, 지붕 등 건축의 기본 요소까지도 변화하겠죠.

김: 자연을 위한 원고(2023)는 지난해 뚝섬 유휴 교각 경관개선 설계공모에 제출한 설계안이에요. 서울이라는 도시의 공원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궁금해요.

허: 공원이 도시에 종속된 공간이 아니려면 어떤 공간적 이미지를 추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부터 출발했어요. 뚝섬 일대는 아름다운 풍광 덕분에 조선시대 왕의 사냥터와 같은 행락 공간이었다가 1930년대 뚝섬유원지로 개발된 이후 1980년대 도시화를 겪으며 현재와 같은 도시 공원이 됐죠. 그 과정에서 실수로 지어진 교각이 존치돼야 하는 이유는 없다고 판단해 단계적인 해체를 골자로 한 공공 공간을 제안했어요. 새롭게 추가된 태양광패널과 스프링쿨러 설비를 지탱하는 구조적 역할을 부여하고, 기반시설이라는 교각의 고유한 기능은 유지하면서 다른 스케일의 금속 원기둥을 열주식으로 배치, 거대한 원기둥 교각을 유리블록으로 마감해 추상화했죠. 특히 중앙에는 버드나무 여섯 그루가 자생해 성장할 숲을 염두에 두고 교각을 이와 관계하도록 설정했어요. 다시 말해 유휴 교각을 도시가 아닌 환경을 위한 기반시설로 재정의하고자 했죠. 이를 통해 자연의 재현이 아닌, 자연적 공간의 회복을 의도해 기존 공원과는 다른 특성을 지닌 공원을 제안했어요. 

가르텐하우스(2021)​ ©architectural/practice

개념과 구축 사이

김: 주로 공모를 통해 아이디어를 제안해왔는데, 가르텐하우스(2021)는 구축까지 이어졌어요. 

허: 가르텐하우스는 강원도 홍천에 지은 주말주택이에요. 대지는 마을의 끝자락, 산으로 향하는 길에 있어 자연과 인공 환경의 경계에 위치해요. 이 건축은 결과적으로 농막인데요. 다분히 농막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유형학적 보편성을 띠지만, 이 유형 안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스케일이라는 점에서 특정적이에요. 농막은 대개 이동식 주택으로 지어지기 때문에 교통법에 의해 높이가 최대 4m 이내에서 정해져요. 그런데 대지가 마을 끝에 있어 트럭이 들어가기 어려웠기에 현장에서 시공했죠. 제한된 공사비와 효율성이 극대화된 이동식 주택 유형에서 특별한 디자인을 추구하는 것이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고 생각해, 유형 내에 머무르면서도 환경에 대응할 수 있는 지점을 고민했어요. 이동식 주택이 아닌 농막은 면적 제한만 있을 뿐 높이에 대한 제한은 없었기 때문에 스케일을 통해 환경에 대응할 방법을 고민해 4.5m 높이를 구현했어요. 여기에 땅에서 농막으로 오르는 계단에도 변주를 시도했는데, 오를수록 너비가 점점 넓어지는 계단을 만들었어요. 내부로 진입 시 외부 환경이 점점 줄어드는 점을 개념적, 물리적으로 표현했죠. 대지에는 기존에 조성되어 있던 인공 연못이 있는데, 농막의 지붕 끝 거터를 연장해 연못과 연결했어요. 이로써 인공 연못이 단순히 미학적 조경이 아니라 건축과 함께 환경적으로 작동하는 주체가 되면서 종속된 공간 개념을 벗어나게 되죠. 보다 유기적인 건축을 구현하려 했어요.

김: 가구디자인도 종종 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공간을 만드는 일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지점이 있을 것 같아요.

허: 성수동에 위치한 패션 브랜드 궤도의 쇼룸(2023)을 디자인했어요. 의자, 테이블, 거울, 행거 등 가구들에 바퀴를 매달아 가변적인 공간구성이 가능하도록 했죠. 궤도의 모태 브랜드인 T.B.O.S의 디자인이 기존 제품을 해체해 재구성하는 방식이라 공간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게끔 의도했어요. 가구와 공간이 서로 맞물려 기능하도록 디스플레이 방식도 큐레이션이 필요한 전시 포맷부터, 많은 옷을 수용해야 하는 스토어까지 가변적으로 구성했죠. 흥미롭게도 옷걸이를 가장 먼저 디자인했는데, 옷걸이를 거는 방식에서 벽면의 디자인을 도출했어요. 다른 분야이긴 하지만 가구도 공간적, 건축적으로 접근하려고 해요. 가구의 재료나 구축 논리도 흥미롭지만, 그에 앞서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디자인의 당위가 없으면 작업하기 어려워 하는 성향이에요. 

김: 다양한 작업에서 개념과 구축이 뒤섞이는 지점이 흥미로워요. 

허: 일반적으로 개념 뒤에 구축 논리가 따르는 게 자연스러운 방식이지만, 한국의 건축 환경에서는 구축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개념적인 무언가가 나오는 역전 현상이 분명 있는 것 같아요. 가르텐하우스나 궤도도 그러한 예시이고요.

산들바람이 부는 마루(2023) 렌더링 이미지​ ©architectural/practice / Background image courtesy of JUNLEEPHOTOS

연습하고 깨닫는

김: 지속하는 활동들 가운데 특히 집중하고 싶은 영역이 있다면요. 

허: 우선 교육자로서 강의에 좀 더 집중하려 해요. 특히 올해는 스튜디오 수업을 맡아 주제 선정부터 결과물까지 과정을 공유할 수 있는 탄탄한 강의를 운영하기 위해 준비에 힘쏟고 있어요. 또 올해부터 자문밖 아트레지던시에 소속되어 예술의 한 분과로서 건축을 다루는 작업을 이어갈 계획이에요. 출판이나 비평 등 이론적인 영역에도 꾸준히 관심을 두고 있어요. 4월에는 경기도 화성에 위치한 로얄엑스에서 전시가 예정되어 있어 그 작업을 준비 중이에요.

김: 건축적사무소가 그려나갈 궤적이 궁금해져요.

허: 사무소를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설계공모에 꾸준히 도전하고 있어요. 무엇보다 프로젝트 전체를 통합할 능력을 발전시키고 싶은데, 그러한 능력은 실제 건물을 짓는 경험에서 가장 많이 배우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작더라도 커미션 프로젝트는 조건에 관계없이 최선의 결과를 고민해 완성하려고 해요. 예산이 적으면 그 예산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디자인의 자유도가 낮다면 작은 부분에서라도 아이디어를 관철시켜보는 식으로요. 아키텍처럴 프랙티스라는 이름처럼 건축은 늘 연습하고 깨닫는 과정 속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제게는 강의도 건축이고, 전시도 건축이고, 글과 그림도 건축이에요. 모든 것이 건축이다, 라는 한스 홀라인의 말처럼요.

허성범은 2024년 4월호에서 서준혁, 최세진(건축사사무소 만화기획 공동대표)의 오늘을 듣고 싶어 했다.

자연을 위한 원고 렌더링 이미지​ ©architectural/practice​

▲ SPACE, 스페이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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